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스트 슈만 (문단 편집) == 전후 == 1944년에 아우슈비츠를 떠나 작센의 군 병원으로 이동한 슈만은 서부전선에서 군의관으로 일하다가 1945년 1월에 멩겔레와 비슷하게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패전 후인 1945년 10월에 호르스트 슈만은 석방되었고, 1946년에 그라트벡의 스포츠 관련 의사로 일하면서 전쟁이 끝난 후 한동안 별다른 일 없이 평안하게 지냈다. 그러나 1951년에 사냥 엽총면허증을 발급받으려고 제출한 신청서의 심사 과정에서 경찰 당국은 그가 수배 인물임을 파악하였고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낌새를 느낀 그는 여권도 없이 곧바로 해외로 달아났다. 호르스트 슈만은 처음에는 미국을 전전했다. 한동안 어디에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으나 우연한 기회에 밝혀지게 되었다. 독일에서 발간되는 "그리스도와 세계"라는 잡지에 아프리카 [[가나]]의 오지에서 의학기술을 베푸는 '제2의 [[슈바이처]] 박사'라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소개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호르스트 슈만은 가나의 국가수반인 [[콰메 은크루마]]가 이끄는 은크루마 정권이 자신을 끝까지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1966년 은크루마 정권이 무너지게 되자 마지막에는 달아나기도 했지만, 결국 1966년에 가나에서 붙잡혀서 곧바로 독일로 이송되었다. 서독정부에 인계된 슈만은 1970년 9월부터 재판을 받게 되었다. 슈만은 잡히기 이전에 이미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1만 5천여 명을 학살한 혐의가 있었던 강제수용소 의사로 재판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1970년 9월 24일 치명적인 일산화탄소 가스를 집어넣는 버튼을 본인이 눌렀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는 재판에서 1만 4천 5백 명의 장애인과 정신질환자인 독일 사람과 약 8백여 명의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실을 인정했지만, 1966년부터 6년간의 수감 생활로 몸이 위중해졌다고 판단한 법원은 건강상의 이유로 1972년 7월 29일에 호르스트 슈만을 형무소에서 풀어주었다. 의사들의 진단서에는 그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는 11년이 넘도록 더 살았고 11년 후인 1983년 5월 5일 호르스트 슈만은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분류:나치당원]][[분류:독일 국방군/인물]][[분류:슈투름압타일룽/인물]][[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독일의 의사]][[분류:1906년 출생]][[분류:1983년 사망]][[분류:할레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